‘호의’의 사전적 의미는 친절한 마음씩. 또는 어떤 대상을
좋게 생각하는 마음이다.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 호의를 받는 사람을 좋게 생각하여 친절하게 행하는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종종 호의의 의미가 퇴색되는 경우가 있다. 그 중 하나가 호의를 베푸는 사람의 입장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례라고 생각된다. 그 대표적인 표현이 어떤 영화에서 나왔던 대사였던 “호의가 계속 되면은,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이다.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해서 그 사람을 위해서 은혜를 베풀었다면 호의를 입은 사람은 고마워하고 자신의 삶에 대한 발전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자기 권리로 오해하고 당연하게 더 요구하기 때문이다.
“왜 호의를 권리로 오해할까?”를 생각해 보다가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인생의 소망이 없는 바닥으로 인해 자존감이 떨어져 있는 사람이 누군가의 호의를 받으면서 “나를 무시하는 것”으로 느꼈다는 것이다. 진심으로 돕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받는 입장에서 자신을 너무 천한 존재로 여겨서 불쌍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 같이 행한 것으로 불편하게 여겨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왜 호의를 권리로 오해할까”로 여길까 하고 생각해봤다면 호의를 불편함으로 느끼는 그 사람의
마음을 한 번 더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은 어떨까한다. 이왕 호의를 베풀기로 했다면 그 사람의 마음도 호의로
반응할 수 있도록 해보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이것보다 더하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사랑과 은혜(무한정한 호의) 베푸신다. 그런데 우리의 죄된 마음은
호의를 권리로 주장할 때도 있고, 또는 마음의 준비와 성숙이 없어서 호의를 오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주님께서 그 은혜를 오늘도 베풀고 계시다. 주님은 호의를 불편하게 여기는 나의 연약한 자존감조차도
끌어 안으시고, 또 은혜를 베푸셔서 그 묶인 마음이 풀어져 변화된 삶이 되게 하실 것이다.
호의가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주님의 은혜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것임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