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S. 루이스의 쓴 <고양이의 시각>이라는 글에 풍자의
내용이 있습니다. 푸쉬라는 이름의 시골 고양이가 런던에 있는 버킹검 궁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시골 고양이가 궁전에 방문할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웠겠습니까? 반면에
푸쉬를 바라보는 고양이들은 부러움이 가득했습니다.
고양이
푸쉬는 버킹검 궁에 다녀와서 위풍당당한 자세로 다른 고양이들 앞에 섰습니다. 고양이들이 궁금증에 사로잡혀 버킹검 궁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고양이 푸쉬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여왕님의
의자 밑에 기어다니는 생쥐를 보았습니다.”
고양이
푸쉬의 눈에는 버킹검 궁의 화려함과 웅장함 그리고 궁전의 생활이 보였던 것이 아니라 먹고 배를 채울수 있는 생쥐만 보였습니다.
그런데
고양이 푸쉬를 비난할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양이에게 버킹검 궁이 아무리 크고 화려하더라도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고양이에게 궁전의 생활이 어떠한 가치로 다가왔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고양이는 궁전의 화려함을 즐길 수 있는 눈도, 감탄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자신과 관련된 생쥐만 보였던 것이지요.
즉, 우리의 정체성과 내 마음의 생각이 보는 것과 관심을 결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해봐야 합니다. 내가 바라보는 것이 내 마음에 관심이 있는 것이지요. 내가 바라보는 방식이 내 마음의 상태입니다.
특별히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 공동체 안에 지체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있습니다. 그들의 겉모습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예수님 안에서 존중하고 품고 계십니까?
그
사람의 겉모습이 기준이 되기 보다는 내 마음의 상태가 바라보는 기준과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면 그리고 예수님이 상대방 안에 계시다면 우리는 서로를 예수님 보듯이 바라볼 것이고, 주께 하듯이 행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바라보는 시선이 내 마음의 영적 상태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바라볼 수 있는 영적 거인이 되시길
바랍니다.